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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슈머 DNA 그리고 짜파구리의 존재미학

  • 2020-03-24
  • 293
  • by 석혜탁

금요일 퇴근 후 집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주말에 ‘집콕’을 할 때 필요한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서다.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집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하려는 계획을 세웠기에, 집에서 해 먹기 간편한 것들 위주로 카트에 차곡차곡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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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탁


ㅣ오전이면 다 나간다는 그것, ‘짜파구리’의 핵심 구성요소

라면이 빠질 수 없다. 컵라면, 봉지 라면을 골고루 짚는다. 라면 코너에서 유제품 코너로 카트를 돌릴 때쯤, “이것도 그거랑 되는 건가”라는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이것’은 무엇이며, ‘그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 몸과 시선을 돌려보니, 여러 종류의 짜장라면이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내친김에 짜파게티나 하나 사 가야겠다 싶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지나가는 직원에게 문의를 해보니 돌아온 대답. “짜파게티는 오전이면 다 나가요. 짜파구리인가 그것 때문에.”

오호. 정답을 알았다. 위에서 말한 ‘이것’은 짜파게티를 제외한 짜장라면이고, ‘그거’는 너구리였다. 짜파게티가 다 팔린 것을 보고, 짜파게티의 대체재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표물은 당연히 요즘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다. 짜파게티가 아닌 짜장라면과 너구리를 합쳐도 짜파구리가 되는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주지하듯 짜파구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하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짜파구리는 초반에는 ‘람동(ramdon)’으로 번역되었다. 라면(ramen)과 우동(udon)을 합친 말로 한국의 특정 제품을 알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한 표현이다. 번역가 달시 파켓(Darcy Paquet)이 궁리 끝에 내놓은 조어인데, 언론은 그의 언어적 감각과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상찬하곤 했다.


ㅣ모디슈머에게 제품의 재창조 과정은 일종의 놀이이자 게임

짜파게티와 같이 기존의 제조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개인의 미감과 취향에 따라 제품을 재창조하는 사람들을 ‘모디슈머’라고 일컫는다. Modify(수정하다)와 Consumer(소비자)의 합성어다. 

모디슈머는 남들과 똑같이 먹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들은 기성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비트는 데 굉장히 능하다. 그리고 자유롭게 변용해가는 단계를 사진과 영상으로 SNS에 알린다. 남들과 다르게, 그러면서도 더 재미있고 맛있게 먹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놀이이고 일종의 게임이다. 또한 모디슈머는 그 누구보다 능동적인 소비행태를 보이며, 참여와 소통을 중시한다. 


ㅣ모디슈머를 둘러싼 사회적·디지털·리테일 환경 

모디슈머가 주목받고 있는 배경은 크게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회적 환경, 디지털 환경, 리테일 환경의 변화가 그것이다. 

먼저 사회적 환경으로는 1인 가구의 증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간한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19’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는 총 599만 가구(2019년 기준)로 전체 가구의 무려 29.8%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가구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다. 1980년에 1인 가구의 비중이 5%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우리는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가 말한 싱글턴 사회(Singleton Society)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초개인화 문화가 보편화하고 있는 지금,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의견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이고 독창적인 개성이다. 이런 망탈리테(mentalite)가 의식주 모두에 반영되고 있고, 그중 가장 일상적인 ‘먹는 것(食)’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하기’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환경으로는 유튜브를 위시한 개인 방송의 대중화를 꼽을 수 있다. 모디슈머는 ‘꿀 조합’을 만들어냈다는 디지털상에서의 공인을 받고 싶어 한다. 타인의 의견에는 휘둘리기 싫어하지만, 인정과 인기는 받고 싶어 하는 양가적 심리의 소산이다. 먹거리 분야에서 생겨난 때아닌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이 SNS상에서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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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모디슈머의 부상과 맥이 닿아 있다. 단순히 많이 먹을 수 있음을 과시하는 1차원적인 콘텐츠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신선한 조합으로 제3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디슈머들에게 밀레니얼 세대들은 열광한다. 모디슈머의 시선은 일방향적이지 않고, 피드백을 세심히 모니터링하며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마지막 리테일 환경으로는 편의점이라는 유통 플랫폼의 위상 변화이다. 간단한 스낵이나 생필품을 구매하는 공간이었던 편의점은 이제 안 파는 게 없는 생활밀착형 플랫폼으로 웅비했다. 편의점의 수도 30년 전에는 40개가 채 되지 않던 것이 2019년에는 4만 2천여 개를 훌쩍 넘어섰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같이 의무휴업 규제에서도 벗어나 있고, 무엇보다 소비자와 근거리에서 24시간 쉼 없이 영업을 하는 특장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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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은 모디슈머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한다. 편슐랭(편의점+미슐랭), 편스토랑(편의점+레스토랑)이라는 신조어가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닐 터이다. 모디슈머들은 편의점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으며 마법의 재료를 찾아낸다. A와 B를 합쳐 C와 D를 만들어내는 마술사인 모디슈머들에게 편의점은 보물창고에 다름 아니다. 

편의점은 음식을 새롭게 조합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디슈머 레시피로 만든 이채로운 제품 또한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GS25는 참깨라면에 누룽지를 섞어 먹는 ‘참깨 누룽지 탕면’을 PB 제품으로 출시했고, 세븐일레븐은 곱창국수와 라비올리 등이 포함된 ‘모디슈머 세트’를 구성해 배달 주문까지 가능케 했다. 넉넉한 양을 자랑하는 CU의 자이언트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ㅣ모디슈머 DNA, 소맥부터 짬짜면까지 

모디슈머 트렌드의 기원은 무엇일까? 그 당시에는 ‘모디슈머’라고 명명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신명나는 술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말아 마시는 것’ 혹은 ‘섞어 마시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들 아니던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맥이다. 단순히 소주와 맥주를 합쳤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황금비율을 맞추기 위해 ‘주믈리에’가 되어야 했던 경험들, 한 번씩 갖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디슈머 DNA를 공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맥은 브랜드 간 경쟁으로 치닫기도 한다. 소맥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승승장구하던 ‘카스처럼(오비맥주의 맥주 ‘카스’와 롯데주류의 소주 ‘처음처럼’)’의 위세에 ‘테슬라(하이트진로의 맥주 ‘테라’와 소주 ‘참이슬’)’가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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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소맥뿐이겠는가.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사’, 백세주와 소주를 섞은 ‘오십세주’도 주류 분야 모디슈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고 있다. 최근엔 ‘쏘토닉(소주+토닉워터)’ 제품이 각광을 받고 있다. 

직장인들이 매일 햄릿과 같이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점심 메뉴 선택의 시간.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디슈머와 관련한 유구한 전통은 이런 번뇌에서 해방되는 현답을 제시하였다. 짬짜면의 탄생이 그것이다. 볶짜면(볶음밥+짜장면)과 탕짜면(탕수육+짜장면)도 마찬가지다. 중국 음식은 한국의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토록 다채롭게 ‘상품화’되며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너무도 흔해진 라볶이, 치즈라면 등도 섞어서 먹어보는 실험 정신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모디슈머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은 이처럼 진즉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 이를 발판으로 삼아 보다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진력해야 하지 않을까?


ㅣ제품 뒷면에 모디슈머 레시피를 소개하고 나선 제과업체

식음료 기업들도 지금의 모디슈머 트렌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양식품은 모디슈머 레시피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미트 스파게티 불닭볶음면’을 출시했다. 불닭과 미트 스파게티를 조합함으로써 더욱 매콤하게 제품화한 것이다. 

롯데제과는 아예 제품 뒷면에 모디슈머 레시피를 소개하고 나섰다. ‘앙빠(앙금+빠다코코낫)’가 인기를 끌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빠다코코낫’에는 앙빠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야채크래커’ 제품 후면에는 소비자 공모전에서 당첨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아이디어의 제안자가 사용하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적시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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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크래커제품 후면에는 소비자 공모전에서 당첨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석혜탁


해태제과의 ‘홈런볼’도 색다르게 먹는 방법이 있다. 대형마트의 과자 코너에 가보니, 에어프라이어로 홈런볼을 맛있게 먹는 법을 소개한 피오피를 부착해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필자도 이 안내법에 따라 홈런볼을 ‘조리’해보니, 기존에 알던 식감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홈런볼을 맛볼 수 있었다. 훨씬 바삭하면서도 속은 한층 더 촉촉해졌다. 실제로 해태제과 연구소는 ‘홈런볼 튀김’을 제조할 때, 최적의 조건을 찾고자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러 개의 샘플을 140도에서 200도 사이의 다양한 온도로 튀겨 본 것이다. 그랬더니 180도에 3분 가열하는 것과 140도에 5분 가열하는 것이 최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모디슈머 트렌드는 이렇게 과학과도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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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해 홈런볼을 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석혜탁


이 외에도 오리온은 ‘과자 아이스 레시피’를 SNS에 공유했고, 오뚜기는 치즈게티(치즈볶이+스파게티)와 짜라볶이(짜장볶이+라면볶이)를 선보였다. 심지어 호텔에서도 짜파구리를 대령하는 시대이다. 스위트 객실에서 짜파구리를 룸서비스로 제공하는 패키지가 나온 것이다. 모디슈머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은 업계의 경계를 초월해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다시 짜파구리 얘기로 돌아오자. 짜파구리는 청와대 오찬에도 올랐다. 영부인인 김정숙 여사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주한 미국 대사도 대사관 동료들과 짜파구리를 함께 먹는 모습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람동’으로 번역됐던 짜파구리는 이제 우리 한국어 발음 그대로 ‘Jjapaguri(혹은 Chapaguri)’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아, 짜파구리의 존재 미학이여!

모디슈머의 기지와 식음료 및 유통 브랜드의 마케팅 역량이 결합되어 더 많은 짜파구리가 탄생해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길 바란다. 오늘은 짜파구리를 끓여 먹어야겠다.



  • 석혜탁

    중국학, 행정학, 법학, 경영학을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보도전문채널 기자로 합격했다.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저서 :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오늘이 가벼운 당신에게 오늘의 무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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